260730 사 11:1-16 절망의 그루터기에서 피어나는 생명과 회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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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그루터기에서 피어나는 생명과 회복의 역사 (이사야 11장 1-16절)
오늘날 우리는 절망이 일상이 되고, 사방을 둘러봐도 소망의 실마리를 찾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스를 켜면 들려오는 전쟁과 기근의 소식, 무너지는 경제 지표,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에 찾아오는 건강의 위협과 깨어진 관계들에 대한 소식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의 남유다의 상황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사야 10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을 사정없이 찍어버리셨고, 울창한 레바논의 삼림처럼 화려했던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은 뿌리째 찍혀 나가고, 오직 밑동만 남겨진 “그루터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황량한 그루터기 위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막막한 그루터기 위에 새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생명과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절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윗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왕의 이름입니다. 반면에 이새는 베들레헴 시골구석에 살았던 평범하고 이름 없는 한 농부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줄기”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윗 왕조가 누렸던 화려한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다윗 이전의 가장 초라하고 평범했던 시골 가문인 “이새의 상태”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간 절망의 상태입니다. 웅장한 나무가 다 잘려나가고 밑동만 남아서 보잘것없고 죽은 것 같은 그루터기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인 “한 싹”이 돋아나게 하십니다. 이 “한 싹(네쩨르)”라는 단어에서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Nazareth)”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 종인 “세쿼이아(Sequoia)”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수천 년 동안에 거대한 산불들을 겪으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엄청난 산불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주변의 모든 삼림이 시커먼 잿더미가 되고, 세쿼이아 나무 역시 겉은 시커멓게 타버려서 죽은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쿼이아 나무는 산불의 뜨거운 열기를 받아야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솔방울이 열려 씨앗을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검게 탄 그루터기 틈새로 아주 작고 푸른 새싹들을 틔웁니다. 인간의 눈에는 “심판의 불”이었고 그래서 “절망의 불”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고난의 불이 휘몰아칠 때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불로 인해 다 타버린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이제 다 끝났다.”라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려하고 잎이 무성한 가지에서가 아니라, 다 타버린 그루터기에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나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고 “나는 이새의 집안처럼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나의 삶에 구원자 메시아의 새싹을 틔우실 것입니다. 1절에,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한 싹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릴 통치자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 왕에게 임할 성령의 7가지 성품을 묘사합니다. 이 왕은 인간적인 힘이나 전략, 군사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스립니다. 그분의 통치 방식은 세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첫째로, 그는 외모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귀에 들리는 대로 판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의와 정직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을 의지합니까? “내 눈에 보이는 것(외모)”과 “남들이 속삭이는 말(귀에 들리는 것)”에 휘둘려서 인생의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까? 참된 성도는 내 감정이나 세상의 요령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갈등이 생길 때 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잠잠히 엎드려 기도합시다. “성령님, 주님의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공의로 이 상황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6-9절에서는 메시아의 통치가 가져올 궁극적인 우주적 평화를 노래합니다. 이 구절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찬가입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동물들은 서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입니다. 서로 어느 한쪽이 먹혀야 하는 극단의 적대 관계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이들이 함께 뒹굴고, 심지어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9절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온 땅에 가득하게 채워질 때, 죄로 인해 깨어졌던 창조 세계의 모든 적대감과 폭력성이 치유되고 창조하신 모습대로 회복되어 참된 “샬롬(평화)”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온 세계는 증오와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모두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독일군과 연합군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고, 인류는 스스로가 만든 무기에 의해 멸망할 것 같은 공포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극단적 국가주의, 미국의 KKK단과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유명한 “평화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참 지혜를 주소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가 바라보았던 것은 인간의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비로소 완성될 참된 평화였습니다. 인간의 총칼은 평화를 만들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 원수와 같은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원수와의 처절한 전쟁 중에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내 안에 흐를 때, 우리는 원수 같은 사람을 긍휼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번 주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어린 양”이나 '이리' 같은 존재는 누구인지 주변을 돌아보고, 주님의 평화가 내 가정과 일터에 임하도록 화해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16절에서 메시아는 “만민의 기치(깃발)”로 우뚝 서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의 깃발로 높이 드셨습니다. 깃발을 보고 사방에 흩어져 포로 생활을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됩니다.(11-12절) 서로 투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으며 하나가 됩니다(13절).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든 군사들입니다. 하지만 혹시 세상 사람과 똑같이 학벌의 깃발, 성공의 깃발, 재물의 깃발을 흔들며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마음이 상하며 흩어진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깃발을 보고 찾아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아, 저 사람에게로 가면 살 길을 찾을 수 있겠구나.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는 깃발 아래로 가면 나도 위로를 얻겠구나” 하는 소망의 이정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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