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6 사 1:1-20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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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소원 (이사야 1장 1-20절)
오늘 본문인 이사야 1장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인 유다를 향해 터뜨리시는 탄식과 고발로 시작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때는 웃시야 왕으로부터 히스기야 왕에 이르는 시대로 겉으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영적 상태는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의 눈이 어두워서 자신들의 상태가 어떤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와 예배와 삶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1-2절에, 하나님은 먼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소환하시며, 유다 백성을 향해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라고 탄식하십니다. 또한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련하다고 여겨지는 소나 나귀도 밥을 주는 주인은 알아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먹이시고 입히신 영적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반했습니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바쳐 희생한 부모가 있는데. 그런데 자식이 자라서 힘이 생기자 부모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명절에 돈만 보내면서, “내 할 도리는 다했다.”라고 말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행한 짓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필요할 때 복이나 얻어내는 “자동판매기”처럼 취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인이요 나의 아버지로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삶에 문제가 생길 때만 하나님을 찾고, 평소에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는 것을 귀찮아하지는 않습니까? 주인의 구유를 아는 나귀보다 못한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5-9절은,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로 매를 맞아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터지고 깨진 유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면 그 원인을 찾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들은 엉뚱한 처방을 내립니다. 바로 '종교적 열심'을 더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제물과 성회, 기도를 향해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십니다. 11-14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15절), 즉 불의와 죄악을 행하는 삶의 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배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한 것, 성전 마당만 밟는 것, 심지어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아내를 무시하고 폭언을 일삼는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남편이 결혼기념일에 최고급 명품 가방을 선물하며 “나 멋진 남편이지?”라고 한다면, 아내가 그 가방을 받고 기뻐할까요? 아닙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명품 가방이 아닌 남편의 진심 어린 사랑과 존중, 변화된 태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친 수많은 양과 소의 기름은 하나님께 '명품 가방으로 때우려는 위선'과 같았습니다. 주일에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당에 앉아 찬양하고 헌금하는 행위가, 평일에 지은 나의 죄를 덮기 위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직장, 가정, 학교)에서는 이기적이고, 거짓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주일에 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에 묻은 피, 즉 세상에서의 탐욕과 시기를 씻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동사들을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16-17절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감정적인 눈물 흘림이 아닙니다. 회개는 사회적인 약자(고아, 과부, 학대받는 자)를 향한 공의의 실천이며, 내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는 “삶의 개혁”입니다.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그 위에 향수만 줄기차게 뿌려댄다고 냄새가 사라질까요? 잠시 가려질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 고약하게 썩어들어갑니다. 해결책은 향수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고 바닥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는 “향수”와도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삶의 쓰레기(악행, 불의)를 치우는 진짜 청소(삶의 개혁)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선행과 정의는 무엇입니까? 내 주변에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것,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것, 가계에서 정직하게 거래를 하는 것, 가정에서 가족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에서부터 참된 예배는 시작됩니다. 종교적 형식 뒤에 숨지 말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를 나타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심판으로 백성들을 쓸어버리실 수 있는 분이지만, 도리어 그들을 은혜와 화해의 테이블로 초대하십니다. 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변론하자”라는 말은 법정 용어로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더 큰지,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지 한번 따져 보자는 초청입니다. 주홍색과 진홍색은 당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염색 기법을 뜻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죄의 얼룩을, 하나님이 완벽하게 씻어주시겠다는 파격적인 용서의 선언입니다. 19-20절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는 말씀은 순종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초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재산을 탕진하여 돼지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비참한 지경(오늘 본문의 5-6절 상태와도 같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습니다. 본문에서,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죄로 찌든 우리를 정죄하여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려내어서 흰 눈처럼 깨끗하게 하시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가 주홍빛처럼 붉고, 도저히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합시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찌든 죄악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받은 자의 삶은 달라져야만 합니다. 예배당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진짜 예배가 시작됩니다.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우리 주변의 약자들을 돌보고 정직을 행하는 “삶의 예배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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